소리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다.
깊은 곳에 웅크린 외로움
외로움이 독을 마신다.
그리고 의식을 잃는다.
가난한 흰 들판에 뚝, 뚝, 저녁 핏물이 든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자
사람들은 사랑이 떠나갔다고 했다.
소리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갔다.
황폐한 들판에 뿌리채 뽑혀진 사과나무.
사랑은 태풍처럼 왔다가
농약처럼 사랑하다가
파헤쳐진 흙이 되었다.
그리고
사랑은 떠나갔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얼굴에 고운 화장을 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50 주년 기념 시집 <소리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이철성 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