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달

‘시인 이철성의 시와 산문’

내가 왜 이곳에 이르렀는지는 모른다. 눈을 떠보니 바다다. 검은 새벽 나무껍질로 엮어 만든 헛(오두막)의 창문 밖에서 바다가 으르렁대고 있다. 일어나 헛 밖으로 나간다. 모래다. 모래가 시원하게 발바닥을 핥고 발가락들 사이를 핥는다. 간지럽다. 검은 하늘에도 모래다. 가득 뿌려놓은 별 모래. 땅에는 검은 물이 파도치며 땅의 모래를 핥고, 하늘에는 검은 하늘의 물이 별 모래를 핥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물을 하늘의 물과 땅의 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저 물과 이 물이 낮에나 밤에나 같은 색깔 같은 질감이고나. 실제 히브리어로 ‘샤마임’은 ‘하늘’을 뜻하는데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샤(저기에 있는)+마임(물)’이란 뜻이다.

검은 바다에 한발 한발 다가설 때마다 무서움을 한 움큼씩 삼킨다. 어둡기도 하거니와 그 소리가 대단하고 그 광활함이 먹먹하다. 난 큰물이 삼켜버리는 한 알의 모래와 다름없다. 그 물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까이 앉아 생각한다. 난 어제 오후에 이곳 남 고아의 아곤다 해변에 도착했다. 오토바이를 한 대 빌려 사람 없는 해변을 찾아 헤매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몇 채의 헛과 몇 개의 레스토랑, 해변엔 인적이 드물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은 바다와 뭍 두 가지뿐이다. 내가 왜 이곳에 이르렀는지는 모른다. 특별히 이곳일 필요는 없다. 단지 이삼일 전부터 이곳 바다 연안을 계속 배회하고 있다. 바다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저 하늘에선 여인의 부풀어 오른 배처럼 볼록한 달이 바다를 잡아당기고 있다. 바다가 부풀어 오르며 흥분한다. 부풀어 오른 바다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 삼사일 내륙의 오지에서부터 여기까지 바다의 냄새를 향해, 바다의 처얼석 처얼석 하는 거친 숨소리를 향해 달려왔다. 마침내 바다 가까이에서 바다가 나타나기도 전에 바다가 바로 여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냄새가 아니었다. 그 처얼석하는 숨소리도 아니었다.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그 흥분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새벽잠을 깨워 나를 이 어둠의 물로 잡아끈 것은 달과 바다이구나. 아니 바다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볼록하게 흥분시키고, 밀고 당기며 흔들고, 검은 물 위에 자기의 흰 빛들을 뿌리며 희롱하고 애무하는 달과, 그 달의 기운에 흥분하여 자꾸 출렁이고, 괜히 뭍에 자기 살을 비비고 비벼대고, 처얼석 처얼석 하는 거친 숨소리들을 뿜어대고, 흰 물보라와 거품들과 바닷게들을 내뱉고, 내 발과 몸통까지 먹어치우려고 안달을 하는 바다의 검은 입, 그 욕정이구나.

난 이 부풀어 오른 대자연 앞에서 더욱 생각에 잠긴다. 달은 지구가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 하루 왼종일, 사시사철, 아니 영원토록 물 위에 자신의 흰 빛을 뿌리며 밀고 당긴다. 바다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뭍을 핥으며 밀고 당긴다. 태초에 달의 흰 정자들을 받아 삼킨 이 검은 바다 속에서 생명이 탄생했다. 그리고 생명은 바다가 뭍을 비비고 또 비벼대는 이 뜨거운 경계에서 물의 생명에서 뭍의 생명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사람이 되었다.

난 왜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긴 생각에서 깨어난다. 바다가 나도 모르게 내 위로 올라 타 몸을 비비고 있다. 바지와 웃옷을 벗는다. 속옷은 진작부터 헛에 두고 나왔다. 바다는 이 순간 하나의 동물이다. 거칠게 숨을 뿜어내다가도 얌전히 뒷걸음질 친다. 동물의 혀가 모래를 핥고 나를 핥는다. 난 모래에 뒹굴고 혀 위에서 뒹군다. 동물이 날 꿀꺽 삼기면 난 까마득하게 흩어진다. 나의 정신은 검은 물속에서 까마득하게 흩어진다. 시원(始原)의 생명들이 몰려오는 소리들 들린다. 검은 물 깊은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