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불렀다.
깊은 곳에 웅크린 외로움
외로움이 독을 마신다.
그리고 의식을 잃는다.
가난한 흰 들판에 뚝, 뚝, 저녁 핏물이 든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자
사람들은 사랑이 떠나갔다고 했다.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갔다.
황폐한 들판에 뿌리 채 뽑혀진 사과나무.
사랑은 태풍처럼 왔다가
농약처럼 사랑하다가
파헤쳐진 흙이 되었다.
그리고
사랑은 떠나갔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얼굴에 고운 화장을 하고 있다.
시집 <비파 소년이 사라진 거리>에 수록된 시이다.